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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슈

육아휴직이 아니라 ‘돌봄휴직’? 성 중립 언어로 진화하는 제도

by thenofaceissue 2025. 6. 4.

육아하는 부모

 

  우리 사회는 오랜 시간 동안 ‘육아’와 ‘출산’을 여성의 몫으로 여겨왔다. 이런 인식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육아휴직’, ‘출산휴가’, ‘유산휴가’ 같은 용어는 모두 여성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가족 구성의 다양성과 남성의 돌봄 참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용어들을 더 포괄적이고 성 중립적인 표현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정부, 기업, 시민사회 등 여러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단어 하나를 바꾸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언어는 사고를 규정하며 사회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왜 용어를 바꾸려 하는가?

‘육아휴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여성을 떠올린다. 마치 육아는 여성이 휴직을 하며 도맡아야 할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전제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남성도 육아에 적극 참여하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하며, 비혼·비출산을 선택하는 삶도 존중받고 있다.

마찬가지로 ‘유산휴가’라는 표현 역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 용어는 여성의 상실을 단순히 ‘휴가’라는 행정적 용어로 처리하고, 감정적 고통이나 회복의 필요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다. 또 ‘유산’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이고 무거운 느낌을 주며, 마치 실패나 잘못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런 용어들은 결국 당사자들에게 더 큰 상처가 되거나, 사회의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


논의되고 있는 대체 용어들

현재 공공기관과 일부 지자체, 기업 등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체 용어를 사용하거나 검토 중이다.

기존 용어 대체 제안 용어 의미 및 취지
육아휴직 돌봄휴직, 부모휴직 성별 관계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중립화
출산휴가 출산지원휴가, 출산준비휴가 출산 전후의 지원을 강조하고 준비 기간 포함
유산휴가 임신중단 회복휴가, 회복휴가 의료적 회복과 정서적 치유를 중심에 둠
배우자출산휴가 동등출산휴가, 파트너출산휴가 다양한 가족 형태와 성 역할 변화를 반영

 

이러한 대체 용어는 단순한 표현의 변화가 아니라, 정책과 사회 인식 구조를 바꾸는 실질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 용어를 바꾸면 그에 따른 법 개정과 제도 설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국내외 사례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공식적으로 법적 명칭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변화의 움직임은 분명히 존재한다. 서울시를 비롯한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정책 문서나 안내서에서 '육아휴직' 대신 '돌봄휴직'이라는 표현을 시범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공공기관에 성 중립적 언어 사용을 권고하고 있으며, 여성가족부도 ‘성인지 언어 가이드라인’을 통해 관련 용어의 개선 필요성을 제시한 바 있다.

해외 사례는 더 앞서 있다. 예를 들어, 스웨덴이나 독일 등 복지 선진국은 ‘Parental Leave(부모 휴직)’라는 용어를 사용해 성별에 상관없이 부모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제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 일부 주나 기업에서는 ‘Miscarriage Leave’ 대신 ‘Pregnancy Loss Leave(임신 손실 휴가)’ 같은 정서적으로 더 섬세한 표현을 사용하는 곳도 늘고 있다.


언어가 바뀌면 인식도 바뀐다

언어는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 문화, 사회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또 형성한다. 예를 들어 ‘미혼모’라는 단어가 ‘한부모’로 바뀌면서 사회적 편견이 줄어들고, 지원 제도가 확장된 것처럼, 육아와 출산 관련 용어도 바뀌면 사회의 시선이 변할 수 있다. '육아휴직'이라는 단어 대신 '부모휴직'을 사용하면 남성의 육아 참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유산휴가' 대신 '회복휴가'라고 표현하면 상실을 겪은 이들에게 심리적 치유를 위한 여유를 줄 수 있다.


용어 변경에 대한 우려와 반론

물론 이런 변화에 대해 “용어만 바꾼다고 현실이 달라지느냐”, “혼란만 초래한다”는 비판도 있다. 특히 기업이나 행정기관은 새로운 용어에 대한 정의, 범위, 적용 기준 등을 다시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시행 초기엔 혼란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언어는 현실을 반영함과 동시에, 현실을 선도할 수 있는 힘도 있다. 제도적 변화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어부터 바꾸는 것이 변화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작지만 중요한 변화, 함께 만들어가야 할 언어 개혁

‘육아휴직’, ‘출산휴가’, ‘유산휴가’라는 익숙한 단어들이 이제는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그 변화는 단지 말의 선택을 넘어서, 돌봄과 출산에 대한 인식, 젠더 평등, 사회적 배려의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언어는 작지만 강력한 도구다. 바뀐 단어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행동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제는 여성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돌봄의 언어를 고민할 때다.